시세계  부드러움을 한없이 펴는 비둘기같이  상냥한 손을 주십시오,  빛나는 바람 속에서 태양을 바라  
꽃피고 익은 젖가슴을 주십시오.
샛말간 들이랑 하늘이랑 바다랑  
그런 냄새가 하는 입김을 주십시오.
불타는 사과인 양   
즐거운 말을 주십시오.
오! ┳た“ 내 자신의 모습을 주십시오.
-원(願)-
전봉건의 시세계는 맑고 투명한 동화같은 순수함에서 출발했다.그의 처녀작인 <願>에서 그가 보여준 <비둘기같이/상냥한 손><태양을 바라/꽃피고 익은 젖가슴><불타는 사과/즐거운 말>을 달라는 그의 노래는 전봉건의 시적 본질을 말해주는 것이다.<상냥한 손>과 <익은 젖가슴>, <즐거운 말>은 부드러운 이미지의 그의 본래적 자아를 보여준다.이러한 전봉건의 시적 본질은 6.25를 겪고 난 이후에도 양상의 변화만을 보일 뿐 본질적인 변모는 나타나지 않았다.1950년 6.25가 일어나기 직전에 등단한 전봉건은 전쟁이 나자 위생병으로 배치되었다가 1년만에 부상으로 제대하게 된다.그러므로 전봉건의 본격적인 작품 활동은 제대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육이오 때 이등병이었습니다.
위생병이었기 때문에 총격전이나 육박전을 벌인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부상을 당한 사람, 죽은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전장은 못 견디게 피곤한 곳이었고 허기진 곳이었고 또 무서운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늘 실컷 눈빠지게 잠 잤으면, 실컷 배터지게 먹었으면, 또 남이야 어떻든 죽지 않고 살아 남았으면 하는 욕심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운수 좋게 부상만 입고 돌아온 뒤에야 비로소 나는 사람답게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꿈도 꾸면서 살아야지 하는 욕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나는 전쟁으로 해서 본능적(동물적)인 욕심과 사람다움의 그것이 어떻게 얼마나 다른 것인가를 제법 똑똑히 알 수가 있었습니다.
전봉건, 단상, 『전봉건 시선』, 탐구당, 1985, p244
전봉건은 6.25를 직접 몸으로 겪으면서 느낀 전쟁의 참담함, 형 전봉래의 자살과 전우들의 죽음, 일상에서 강제적으로 끌어내어짐을 당한 사람들을 보면서 그의 순수함에 타격을 받게 된다.전봉건의 이 전쟁체험은 이후 지속적으로 전봉건의 시세계와 깊이 관련을 맺게 된다.전봉건은 전쟁이 끝나고 난 40여년 뒤 작고하기 전까지도 전쟁으로 인한 ‘전쟁기억’, ‘상흔’
을 끊임없이 드러냈다.고은은 전봉건을 50년대의 아들이며 주인공으로, 그리고 6.25의 장남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그에게 전쟁의 외상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는 그의 시작과정을 통해 잘 드러난다.그의 초기 시에서부터 후기 시에 이르기까지 그의 전 작품은 전쟁이나 죽음에 관련된 소재나 모티프로 착색되어있다.
나는 나무를 겨누어 본다  꼭대기의 잎사귀를 겨누어 본다  그리고 돌맹이를 겨누어 본다  그러다 싫어지면 쑥 총구를 높여서  개머리판에 뺨을 부비면  하늘이 가늠쇠 구멍 속에 들어온다  m1가늠쇠 구멍 속에서 하늘이 벌어진다  m1가늠쇠 구멍 속에 하늘이 작다  그 하늘 밑에 내가 있다  나는 하늘을 본다  작은 하늘은 눈에 해롭다  가늠쇠구멍이 흐려진다  나는 장난을 그만 둔다  
-장난-

난데없는 전쟁을 겪은 전봉건은 전쟁의 괴로움 속에 침전하기보다 자신으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보인다. 이 예로 시 <장난>은 전쟁을 비극적 체험과 실존적 생존 경쟁의 치열한 장으로 보지 않고 이를 희극화하고자 한다

가령 전선의 현장에서 생과사라는 실존적 위기의 절박한 상황 속에서 ‘총’이라는, 전쟁에 있어서 자신을 지켜주는 최소한의 자기생존의 수단을 장난의 도구로 보는 것이 그 본보기이다. 실존적 개인이 경험하는 전쟁은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싸움이 아니라 한갓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이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허무의식이 기호화된 것이다. 전쟁은 본래적인 일상의 질서를 파괴하고 전장이라는 상황 속에서의 일상의 모습으로 변형되어 여전히 존속한다

그러나 그것은 작은 가늠쇠 구멍 속의 하늘이며 소외되고 왜곡된 일상의 모습이다. 이때 인간과 인간은 제각기 폐쇄된 상황 속에서 어떤 의사소통적인 행위도 단절된 채 고립되어 있다
   (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