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변론 <글짓기>
1.집에 돌아오자마자 p는 컴퓨터를 켜고 늘 드나드는 사이트를 띄웠다.새 알림이 다 섯 개나 들어와 있었다.모두 p 자신이 올린 글에 달린 댓글이었다.하나같이 파일 올 려줘서 감사하다, 잘 보겠다는 내용이었다.개봉되지도 않은 영화를 어떻게 구했느냐며 놀라움을 표하는 사람도 있었다.p는 불법 파일공유 사이트의 활발한 회원이었다.아르바이트를 하고 집에 오면 남는 시간은 영화 파일을 올리고 수입되지도 않은 외화를 몰래 구해다 번역하는 일을 했다.사람들이 자신의 파일을 다운받을 때마다 들어오는 포인트도 쏠쏠했고 무엇보다 댓글 을 달아주는 사람들로 인해 p는 소소하게 시작한 일에서 큰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불법 공유 사이트 위로 포털사이트를 띄워 놓고 신문 기사 몇 개를 둘러보던 p는 오 늘은 영화 파일을 올리는 대신 더 재밌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신문기사들은 저마 다 다르게 해석한 어느 신인 가수의 표절 사건을 대문짝만하게 실어 놓고 있었다.이름은 l.요즘 잘 나가는 남자 가수였다.보아하니 얼굴만 반질반질한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p는 웹사이트 곳곳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요새 가수는 다 가 순가? p는 영화에 자막 넣던 실력을 살려 신인 가수의 노래와 표절당한 노래를 절묘하 게 합쳐 놓은 동영상을 만들었다.몇 번을 재생해 봐도 완벽했다.p는 늘 영화를 올리 던 사이트에 그 동영상을 업로드하고 어떤 자극적인 제목을 적어야 사람들이 많이 클 릭할까, 하며 고민하다 마침내 제목을 달고 글을 올렸다.신인 가수 l, 이건 표절이 아니라 복사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급격히 늘어나는 조회 수와 더불어 댓글 란에는 사람들의 의견 이 나뉘어 열띤 토론이 펼쳐지고 있었다.동영상을 퍼간다는 사람들도 많았다.p는 흐 뭇한 기분을 느끼며 오늘 올리지 못한 영화 파일을 정리했다.그런데 열어둔 메신저 창으로 누군가 보낸 쪽지 창이 반짝거렸다.[p님이시죠? p님이 올려주시는 자료 잘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p님이 더 활발한 활동 하실 수 있도록 자료 하나 건네드리고 싶습니다.
촬영 예정 잡혀 있는 영화 대본인데, 투자비만 200억 들어온 대박 영화 대본입니다.
답장 주세요. ] 본능적으로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이사람, 거짓말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거짓말이라고 하더라도 p는 손해 볼 게 없었다. 그러고 보니 소문으로 올해 말에 개봉 할 예정인 영화중에 200억, 200억 하며 화제가 된 영화가 있다는 얘기는 들었었다
엄 청나게 유명한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다지? p는 상대방에게 긍정의 답장을 보냈다. 얼
마 지나지 않아 파일이 도착했고, p는 주저 없이 그것을 인터넷에 올렸다.죄책감은 없었다.p는 더 큰 화제와 갈등을 빚어내고 그 중심의 그림자에 자신이 들어 앉아 있길 원했다.자신의 행동으로 누군가 피해 입게 될 거라는 막연한 생각은 있었 지만 피해 입는 사람이 p 자신이 아니라는 게 더 중요했다.몇 분마다 새로고침 키를 눌러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하느라 그의 눈은 어두운 방 안에서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2.“김 감독, 이러고도 당신이 영화인이야? 남의 거 훔쳐가는 도둑놈이 메가폰 잡은 영 화가 잘 될 것 같아? 이건 다 내 시나리오에다 내 이야기라고! 이거 놔! 이거 놓지 못 해?” 난데없이 촬영장에 들어와 한참을 소리치던 초췌한 얼굴의 남자가 스태프들에 의해 촬 영장 밖으로 끌려나갔다.모두 어리벙벙해 있는 가운데 촬영장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김 감독은 잠시 쉬고 나서 촬영을 재개하자며 멋쩍게 웃곤 세트장 밖으로 나갔다.간 이의자에 걸터앉아 물병을 집어 들던 l은 스태프들이 수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가뜩이나 대본 유출 건 때문에 촬영 중단이라는 얘기까지 돌고 있는데 웬 난리람.” “음, 사실은 우리 영화 시나리오 김 감독이 직접 쓴 게 아니라던데요? 방금 그 사람이 대본 원작자인데 김 감독이 투자자들 모아준다고 하면서 가로채갔대요.김 감독, 이 바 닥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잖아요.당연히 얼씨구나 믿고 맡겼겠죠.” l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불안한 마음이 들었다.l은 원래 가수로 데뷔해 앨범도 내 고 신인으로서는 운 좋게 지상파 방송에도 고정으로 출연하며 인지도를 쌓아가던 중이 었다.나날이 높아가는 인기에 힘입은 l은 두 번째 앨범을 발매하지만, 타이틀로 내세 운 곡에 문제가 있었다.먼저 나온 어느 밴드의 곡과 l의 노래가 후렴구만 빼면 거의 똑같았던 것이다.표절당한 곡과 l의 곡을 비교해 놓은 동영상이 떠돌면서 논란은 더 해졌다.작곡가라던 사람은 잠적했고 l은 대중에게 질타와 함께 반짝 인기에 배불렀다 는 이야기까지 들었다.그렇게 한순간 최악으로 치달았을까 싶었던 삶에서 지금 찍는 영화는 한 줄기 빛이었다.원래 연기에도 관심이 있어 언젠가 가수와 배우를 같이 하 려는 욕심도 있었으니, 그 시기가 조금 더 빨리 온 셈 쳤다.그러니 l은 영화에 큰 기 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대본 유출에 도용이라니! 스태프들의 말이사실이 아니 기를 바랐다.“그런데 그 뭐냐, 대본 유출한 놈은 잡혔대요? 사이트에 풀린 거 빨리 처리 못 했으 면 촬영이고 뭐 다 접어야 했을 텐데.” “글쎄.못 잡았다는 것 같던데 �.추적하기가 쉽지가 않다나봐.뭐 그런 놈들이야 다 똑같지.누구는 혼을 다 짜내서 글 만들고 음악 하고 영화 찍고 하는데 누구는 클 릭 몇 번으로 쉽게 손에 넣고.우리나라 불법 다운로드 사이트만 몇 갠지 알아? 국산 으로 뭘 만들려고 해도 안 되는 이유가 그거야.국민이라는 사람들이 겉으로는 엔터테 인먼트 산업 국산 애니메이션 운운 하면서 속으로 그러면 쓰나?”
“하긴 그래요. 그런데 그런 문제는 사람들 인식이 바뀌지 않는 이상 고쳐지기는 힘들 잖아요
전 무엇보다 소중한 창작물들을 마음대로 보고 도용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 람들 생각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작권법도 더 강해져야 하고요
미술 시간에 그림을 그리는데, 나보다 늦게 그리기 시작한 옆 친구가 내 걸 베껴 그리고 있다고 생 각해 봐요. 그런데 정작 그 놈은 그게 잘못된 건지 모르고요
그 사실만으로도 전 기분 나쁠 것 같아요. 알고 보면 단순한 사실이죠
그래서 어떤 의미로 보면 저작권법은 문 화예술 전반을 넘어서 사람의 기본적인 감정까지 지켜주는 유일한 울타리라고 생각해 요. 그러니 저작권법이 강화되어야 그런 일이 없을 텐데
햐, 그러고 보니 나 참 말 잘 한다. 그런데 장 감독님은 정말 그런 사이트에서 영화 다운받아본적 없어요?” “야 임마, 난 내가 촬영감독 맡은 영화든 뭐든 꼭 영화관 가서 제 돈 주고 본다
” 김 감독이 촬영장 안으로 들어오자 스태프들의 대화는 그걸로 끊어졌다. 김 감독의 얼굴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했다
감독의 지휘 아래 다시 촬영이 재개되었다. l 은 머릿속이 복잡해진 채 대사를 하느라 두세 배는 더 신경써야 했다
표절, 도용, 저 작권이니 하는 문제들은 이미 너무 많이 겪어서 신물이 났다. 그가 불렀던 노래와 그 가 연기하는 배역까지도 가짜라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하 생략)
